interview10. 김도선 어르신

서울 중구 다산동 ‘태양컴퓨터크리닝’ 사장님

2008년 이 곳으로 이사 왔을때 세탁소에 갔다. 

세탁물을 드려도 일주일이 넘어야 다시 찾을수 있고, 어르신의 차가운 성격에 불만을 꾹꾹 참았다.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좀 더 먼 다른 세탁소를 이용했다. 그런데 그 다른 세탁소가 며칠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고, 나는 어쩔수 없이 다시 이 곳을 이용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르신 비유 맞춰 갔다. 불편해도 어쩌나 이 곳 밖에 없는데…. 그렇게 종종 어르신을 마주치다 보니 이런저런 진지한 얘기들이 오갔다. ‘인생이 뭐라 생각하느냐?’, ‘옷 수선이라는게 다 규칙이 있고 방법이 있는거다’ 진지한 질문과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어르신이라는 이유에서 만은 분명 아니었다. 종종 마주 칠때 마다 인사하면 “요즘엔 왜 안놀러와요? 내가 우리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청년인데…”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또 놀러갔다. 이번에는 좀 길게 얘기해 봐야지. 

: 일단 물 한 컵 놓고 진진하게 해 봅시다.(웃음) 내가 양해를 구할게 있는데, 6월 29일날 전립선 수술을 했어요. 이것이 자리가 잡히는데 빠르면 3개월, 오래 걸리면 6개월도 걸릴수 있다고 해요. 

- 아 큰 수술하셨구나. 몸은 괜찮으신 거에요?

: 뭐 수술은 잘 됐다고 해요. 내가 생활력이 강한사람이에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누워서 엄살 떨었을텐데, 그러지 못하고 ‘죽는날 까지도 열심히 일하다 죽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허허

- 이제 쉴 때도 되셨잖아요?

: 1935년 생이니까. 계산해봐요. 서양에서 뱃속 나이는 안치잖아요. 동양은 뱃속 나이를 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요. 동양 나이로는 딱 팔십이에요. 자식들을 칠남매 낳아서 다 시집, 장가 보냈거든요. 나 애국자요. 허허

모든 것이 내가 노력을 하지 않고는 해결이 안된다는 생각해요. ‘많은 노력의 결과가 오늘에 왔다’ 라고 생각해요. 지금 34살 먹은 손자도 있고 자식들도 살만큼 다 살아요. 자식들이 “아버지 용돈 필요하세요?” 그러면 내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해요. “그런 소리 할거면 오지도 말라고” (웃음) 

image

- 고향이 여기(서울)는 아니시죠?

: 내 태생지는 전라남도 해남이에요. 땅끝이여(웃음) 

첫 아내가 딸을 셋을 낳고서는 가출을 해버렸어요. 근데 그 사람이 진 빚을 내 힘으로 값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1966년도에 서울로 도망치듯 왔어요. 딸 셋이 있으니까 여자를 어설프게 구했어요. 근데 이 여자가 애들을 잡아 먹으려고 몸살을 해. 나도 부모없이 자란 사람인데, 두 번째 아내보고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 엄마 없는 사람이다. 애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라. 그거 죄다” 그런데 이 여자가 ‘나는 새끼만 생각하고, 각시는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면서 나를 적대시 해요. 그러면서 아들, 딸 삼남매를 더 낳았어요. 그리고 자꾸 집을 나가는 거에요. 두 달 만에 들어 오고, 석 달 만에 들어 오고, 어떨 때는 반 년 있다가 들어 오고 그러더니 여섯번째 나가더니 영 안들어와. 속으로 생각했어요. ‘내가 죽어야 할 운명인가?’ 새끼들 여섯명 하고 나 포함해서 일곱명 이잖아요. 그래서 삼년을 기다렸어요. 기다리다 내가 지쳐버렸어요. 

- 아… 그래도 혼자 자식 여섯명을 어떻게 키우세요.

: 그 때 나이가 사십 되었어요. 저기 필동 옆에 묵정동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한 여성분을 만났죠. 그래도 내 얼굴이 동안이잖아요(웃음) 늙어 보이진 않으니까 그 쪽에서 호의를 가지고 보더라고요. 시간만 나면 ‘묵정다방’에 불러 내서 커피 한 잔 같이 하고 몇 마디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나서 “내가 마음에 있는 말을 못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차저차해서 혼자 살고 있다. 내가 운명이 험해서 바꿀수 없는 고약한 운명이다” 라고. ”여차 저차해서 사실은 내가 혼인을 두 번이나 해서 새끼가 여섯이라고. 그래서 가난 할 수 밖에 없고, 무능력하고. 누군가가 나를 붙잡어 주지 않으면 나는 도저히 소생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요. “아니 싫으면 싫다고 얘기를 하지 그러지 말아라. 오늘은 이만 갈란다” 여기 까지만 얘기하고 일주일 있다가 다시 만났어요. 그러니 나와요.(웃음) 싫으면 안나올 텐데 나왔으니까, 아주 싫은건 아닌가 보다 생각했어요. 나와 준 것 만으로 감사하다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공원 같은데 한 번 놀러가면 어떻겠냐고 했어요. 그래서 동작동 국립묘지를 갔어요.(웃음) 거기서 첫 데이트를 한거에요. 

: (갑자기 조용하게)그게 지금 마누라에요. (웃음)

- 하하하. 국립공원 데이트라…(웃음) 그 때는 공원 같은 곳이 별로 없었겠죠? 

: 그 때 공원이 어디있어요! 

그러다가 추석이 가까워져서 어머니가 김제에 계신다는 거에요. 내 사촌 여동생도 그 쪽에 산다고 해서 같이 가면 좋겠다고 했어요. 시간 약속을 하고 서울역에 먼저 나가서 부산행 표를 샀어요. 그리고 어디 숨어 있다가 출발 5분전에 늦은것 처럼 하고 막 뛰어갔어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지금 개찰한다고 빨리 차 타야 한다고 막 뛰었어요. 정신을 빼놓는거지(웃음) 출발해서 대전을 지나니까 이 사람이 차표 한 번 보자는 거에요. 이제 의심을 하는거에요.(웃음) 그래서 내가 ”내가 당신을 유괴하겠냐고. 내가 신사라고! 이 차는 부산 가는 건데 거기서 순천가는 차 타고 김제로 가면 된다. 오늘은 해운대 극동호텔에서 잘겁니다. 내가 방을 분명히 두 개 예약을 했습니다. 방이 하나만 예약돼 있다면 야간열차로 서울로 돌아가세요” 라고 했어요. 호텔에 갔더니 열쇠를 두 개 줘요. 그리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어요.

- 정말 그 날 각 방에서 그냥 주무신거에요?

: 그럼 자기만 해야지 어떡해. 잘못 하면 분위기가 깨지는데.(웃음) 분위기가 굉장히 나한테는 중요했어요. 

- 그 때 방 두개가 상당히 중요했던 같아요.

: 그렇죠. 그리고 나서 이 사람도 나를 진심으로 믿었고 지금까지 같이 사는거 보면 알잖아요?

image

- 어떻게 처음에 세탁일을 하신건가요.

: 1949년 5월 봄 부터 양복점에 들어가 일을 했어요. 처음에는 세탁이 아니라 양복 만드는 일을 했었죠. 그리고 50년도 6월 25일에 전쟁이 났잖아요. 어른들은 다 부산으로 피난 가버리고 나는 갈 곳이 없으니까 피난 안가고 양복점에 있었어요. 피난가는 사람들이 정신이 없으니까 신발이고 옷이고 여분이 없잖아요. 뭐 그럴 형편도 아니었고. 옷이 다 떨어지고, 찢어지고 하니까 사람들이 막 찾아오는 거에요. 전쟁통에 수선비 그 몇 푼이 얼마나 귀해요. 말도 못해요. 그래서 그 때 양복점 할아버지는 돈 많이 벌었죠.(웃음)

- 그럼 그 이후에 세탁소를 하신거군요. 여기서도 오래하셨잖아요?

: 그리고 한 참 후 1980년 부터 양복점이 잘 안됐어요. 그러면서 세탁일도 같이 한거죠.

이 동네에서 한 번은 어떤 아주머니가 고급 원피스를 가지고 와서 뚝 잘라서 투피스를 만들어 줬어요. 그러니까 팔짝 뛰어요. 너무 좋다고. 근데 다시 한 번 가지고 와서 이 옷에 라인이 없다고 라인을 만들어 달라고 해요. “아주머니 그거는 옷이 라인이 없는게 아니라, 아주머니 몸 라인이 없어진거다”(웃음)라고 했어요. 바스트나 웨스트나 히프가 다 어둥비둥 해진거죠. 새 옷이면 라인도 만들고 하는데 원피스를 투피스로 만든걸 어떻게 하냐고 뚝 쏴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죠. 한참을 생각 하다가 “아주머니 이 옷 찾아 갈 때 팔짝팔짝 뛰셨죠? 그걸로 끝내세요. 내가 완벽하게 했는데 손님이 다시 해달라고 하면 나는 안합니다. 이걸 어떻게 뜯어 고쳐야 아주머니가 만족하시겠어요? 이거는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냥 입으시라고 사정을 했어요. 그러더니 조용히 가더라고요.(웃음) 

- 이 동네(‘신당2동’에서 최근에는 ‘다산동'으로 명칭변경) 오래사셨잖아요. 어떠세요?

: 예전에 가족중 한 명이 돌림병(전염병)에 들면 부모가 시궁에 있는 나무에 자식을 꼭꼭 묶어 들어왔다고 해요. ‘너 명 길면 살아서 돌아오고 아니면 혼자 죽어라’ 그 동네가 이 동네라고 합니다. 새 ‘신’자 집 ‘당’자 해서 신당()' 이었는데, 원래는 귀신 ‘신’자 집 ‘당’자 신당(神堂)동’ 이었데요. 신당이 많았다는 거에요. 

- 아 그런 이야기가 있구나.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네요. 그래도 동네가 참 조용하잖아요.

: 그런 이야기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그래도 저녁에 술먹고 꼬장부리는 놈이 없어요. 저녁에 참 조용하잖아요.(웃음) 

- 기억에 남는 영화 있으세요? 

: 70년대. 친하게 지내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영화를 참 좋아하셨어요. 내가 “아저씨가 좋아하는 영화, 나도 보여달라"고 했어요. 허리우드극장에서 <스카라뮤슈>(1952년, 미국) 를 같이 봤어요. 영화 끝나고 가자고 하기에 내가 “아 아저씨 어떻게 한 프로(영화)만 보냐고 한 프로 더 보자”고 해서 더 봤어요. 우리 막내아들 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자기도 ‘아버지 좋아하는 영화 같이 보러 가자’고 해요. 그래서 같이 국도극장(을지로에 1999년까지 있었던 영화관)에서 <기적>(1987년 개봉작, 미국)이란 영화를 봤어요. 그러더니 아들이 너무 재미있다고 한 번 더 보고 가자고 해서 또 봤어요(웃음)

3시간이 넘는 얘기가 마무리 될 때 쯤. 할 말이 더 있다며 나를 다시 부르셨다.

: 얼마전 티비를 보니까 우리나라가 세계 30위 권에 들어갈 만큼 잘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미친놈이 미친소리하고 자빠졌다고 했어요. 대한민국이 잘사는데 쪽방 할아버지들은 비참하게 죽어요.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 아닌가? 그러면 결코 잘사는게 아니죠. 일부 막말로 도둑질 잘하는 놈들이 잘살죠. 큰 도둑놈 들은 청와대에 가 있어요. 작은 도둑놈 들은 교도소에 있고요. 전두환이가 7년 동안 대통령을 하면서 7000억을 모았다고 해요. 이순자(전두환 부인)가 뭐라 그래요. ‘우리는 달라고 해서 받은 돈은 하나도 없다. 준다고 사정해서 받았다’ 아들 전재용이 ‘나는 부정한돈 한푼도 없고 다 축의금 이다’ 매스컴에서 뭐라고 해요? ‘청와대에서 결혼식하는데 그게 축의금이냐. 기업인들이 갔다 바친 내물이지' 이게 지금 도둑놈 나라에요. 나를 '불온분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웃음) 

image

좀 길게 해볼 생각 이었는데, 3시간을 넘겨 버렸다. 하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더 있을까 싶다가도 끊임 없이 말씀하시는 어르신의 열정을 보니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말씀에 가끔 추임새만 넣어줘도 어르신은 신나하셨다.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더라도 묵묵히 들었다. 그냥 그렇게 어르신이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좋은 청년으로 남고 싶었다.

 

 

 

"섬에는 어느 마을을 가나 외로운 노인들이 많기에 가는 곳 마다 내 잠자리가 있었다. 언제 찾아가도 반겨주는 노인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면 끼니는 해결되었다. 외로운 노인들의 넋두리를 들으며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어주면 신이 나서 좋아했다"  

-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중에서

 

배우기 시작 할 때 목적을 설정하면 안 된다.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잘 모를때 오히려 성숙이 일어난다. 자기가 설정한 목표대로만 살아가서는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참을 앞으로 가다 ‘아, 그땐 내가 참 유치했구나’하면서 출발점을 되돌아보게 괴는것, 그러면서 자신이 놓인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고쳐 쓰게 되는 것, 그것이 성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숙의 반대말은 미성숙이 아닌 트라우마다.

시사인 357호 56p

우치다 다쓰루